해기사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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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년도 2012년도
성함 양무공(揚武公) 신순성(愼順晟)
출신 서울
태생 양무공 신순성은 1878년 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나 개화파의 거두였던 박용효의 추천으로 관비유학생으로 처음 선발되어 1895년 일본에서 중학교 과정과 동경상선학교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 갑종 해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정부가 도입한 선박을 운항하다 대한협동우선이 수탁하여 운항한 현익호, 창룡호 등에 부함장으로 승선 근무하였고, 이후 갑종 선장면장을 취득하였다.
1902년 해군력의 증강을 꿈꿔왔던 고종황제는 일본으로부터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를 처음 도입하였고 초대 함장으로 신순성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빈약한 정부의 재정으로 인해 군함으로서의 역할을 한번도 못한 채 일본에 강제 징발되어 화물선으로 개조되었다.
또한 1904년 일본에서 건조하여 도입한 세관 순시선 광제호의 초대 선장을 다시 맡았으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광제호는 일본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바뀌고 군함으로서의 임무를 거둔 채 세관 감시선으로 운영되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태극기를 내리게 되었다. 신순성은 한일합방 전날 광제호에 게양되어 있던 태극기를 내려 소중이 보관하였고, 1945년 해방되고 우리나라 유일한 기선인 부산호의 첫 취항식에 이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이후 이 태극기는 국가에 기증하여 인천항 개항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신순성은 1912년 조선우선(주)가 발족과 함께 광제호를 이양하자 상선의 선장으로 근무하였고, 1919년 인천 해원양성소가 설립되면서 광제호는 실습선으로 변경되어 광제호의 선장과 실습교관을 겸하면서 오랫동안 후배 양성에 열정을 다하였다.
구한말 태어난 그는 해양과 선박에 부정적이고 봉건적 인식이 만연했던 당시 선구자적인 혜안으로 외국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고 익혀야 국가를 지켜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해양에 투신하여 국가에 크게 이바지하다 조국의 해방은 보지 못하고 1944년 2월 7일 영면하였다.
약력 1878년 1월 27일 서울 출생
1895년 - 1895년도 제1차 관비유학생
1897년 - 동경상선학교 입학
1901년 - 동경상선학교 항해과 졸업
정부가 도입하여 수탁한 현익호, 창룡호 등에 부함장 근무
1903년 ? 최초 근대식 군함 양무호 초대 함장
1904년 ? 세관 순시선 광제호 초대 선장
1910년 ? 한일합방으로 인해 광제호에 교체된 태극기 35년간 보관(광복 이후 유일했던 부산호의 첫 항해에 인계되어 계양됨)
1912년 ? 조선우선주식회사 소속 회령환선 조선인 최초로 선장역임
1919년 ~ 1938년 - 인천해원양성소 실습선 광제호 실습교관으로 근무
1944년 2월 7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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