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기사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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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년도 2015년도
성함 秋聲(추성) 정해춘
출신 전남 보성
태생 1913년 3월 16일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교통국 고등해원양성소 본과와 연습과를 졸업하고 갑종2등 기관사 면허장(면허번호 제71호)를 취득하고 조선우선(주)에 입사하여 기관사로 근무하였다.

1941년 1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만주해운(주)에서 기관사로 근무하고 해방이 되어 귀국하였다. 부산항 내에 계류 중인 미 원조선단을 인수하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LST형과 BOLTIC형 8척을 인수하였는데 해기사를 모집하였다. 하지만 한국에는 중진 해기사가 없다하여 미군은 일본인 해기사를 대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를 막아내는 역할도 우리가 수해해야 하므로 선박 인수 기관장도 겸하여 중경 해기사를 모집하여 우리의 힘으로 인수 작업을 무사히 수행하였다.

그 후 군산으로 옮긴 조선해양대학 기관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에게 명 강의로 명성을 얻었고, 「MARINE AJAX ENGINE의 VALVE GEAR AND VALVE MOTION」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해양대학 「바다」지 제1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 후 6·25사변으로 학교가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오자 그해 7월 15일 교수직을 사임하고 1953년 4월 목포 유지들의 초청으로 목포수산상선고등학교(현재 목포해양대학교 전신) 교감으로 1955년 말까지 재직했다.

1956년 1월부터 대한해운공사 소속선 기관사, 기관장으로 1960년 7월까지 해상근무를 하였고, 1960년 8월 다시 목포해양고등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1963년 9월까지 근무했다.

목포해양고등학교 근무하던 중 5.16 쿠데타의 군사정권으로 인해 文管行(1963년 1월 29일) 및 文學管 9389호(1962년 12월 31일자)에 의해 폐교 및 학생모집 중지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木浦海高 1041?의 공문으로 목포해고의 존속을 강조하면서 학생모집을 단행하고 종전과 같이 학교운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문교 단국은 책임을 묻는 이렇다 할 지시가 없었기에 이를 묵인으로 받아들였고 비로소 목포해양고등학교는 “復活이다” 하고 초조감을 진정시켰다. 목포해양고등학교 존속과 현재의 국립목포해양대학교로 발전 큰 기여를 하였다.

이와 같이 해운 초창기의 해운발전은 물론 해양인의 후배양성에 크게 기여한 족적을 남겼으며, 1978년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2011년 8월 29일 향년 99세로 영민하셨다.
약력 - 1934년 : 교통국 진해고등해원 양성소 기관과 졸업
- 1938년 2월 : 교통국 진해고등해원 양성소 연습과 수료
(갑종 기관사 면장 취득)
- 1938년 8월 : 조선우선(주) 기관사 근무
- 1941년 1월 : 만주해운(주) 기관사 근무
- 1946년 3월 : 대한기선공사 기관사 근무
- 1947년 12월 : 조선해양대학 (군산) 기관학 교수 근무
- 1953년 4월 : 목포수산상선고등학교 교감 근무
- 1956년 1월 : 대한해운공사 기관장(남해호) 근무 (갑종기관장면장 21호)
- 1960년 8월 : 목포해양고등학교 교장 취임, 1963년 9월까지 근무
- 1978년 8월 31일 : 대통령 표창장 수여(총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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