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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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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7-03-07 1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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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 확정
인천항 도선사·한국함대 제1전단 사령관 故 윤영원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선정위원회(위원장 임재택, 이하 ‘선정위’)는 2017년 3월 7일 오후 2시 한국해기사협회 5층 회의실에서 2017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 선정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선정위는 추천된 총 2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개개인의 다양한 경력과 공적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으며, 그 결과 故 윤영원님을 만장일치로 확정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선정위원장인 임재택 한국해기사협회장을 비롯해 한국도선사협회 나종팔 회장, 한국선원복지고용센터 류중빈 이사장, 한국해양대학교 이윤철 해사대학장, 목포해양대학교 금종수 해사대학장 등 9명이 참석하였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은 우리나라 해운발전의 초석이 된 해기사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해기 선원직업의 매력화 등을 위해 부산 태종대 공원 내(영도 등대 부근) 1,336㎡ 부지에 2009년 3월 6일에 설립되었으며, 2016년 현재까지 신성모, 이시형, 박옥규, 황부길, 신순성, 유항렬, 이재송, 윤상송, 석두옥, 김재곤, 정해춘, 김윤석 님 등 총 12명을 헌정한 바 있다.
 
한편 올해 헌정식은 오는 5월 31일 「바다의 날」을 즈음하여 개최할 예정이다.

2017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인물 “윤 영 원(尹英遠)”
 
○ 성 명 (漢字) : 윤 영 원 (尹 英 遠)
 
○ 주요약력 :
- 1924년 8월 19일 경상남도 거제군 출생
- 1944년 9월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항해과 22기 졸업
- 해군대학 수료
- 1946년 4월 ~ 1961년 해군 복무
- 1956년 7월 18일 해군수로국장 역임
 ?6.25전쟁 중 동·서해의 기뢰 소해작전, 연합함대합동작전, 피난민 수송작전 등 참전
 ?302함(통영호) 함장, 701함(백두산) 미국 인양, 801함(LST) 함장, PF61함(구축함)함장, 한국함대 제1전단 사령관 역임 등
- 1962년 1월 1일 인천항 도선사 (1992년 퇴임)
- 1975년 인천로터리클럽 회장
- 1985년 국제로터리 제369지구(인천·경기) 총재
  (국제로타리 한국 Polio Plus 위원 역임)
- 1990년 5월 ~ 2000년 1월 인천재활협회 회장
- 1995년 「바다는 나의 보람」 회고록 출간
- 1996년~1998년 한국로타리클럽 총재단 제6대 의장
- 1951년 10월 28일 충무무공훈장(해군본부소해정대)
- 1952년 11월 08일 을지무공훈장(해군본부801함)
- 1953년 01월 20일 충무무공훈장(해군본부신병훈련소)
- 1954년 미국 동성(Bronze)무공훈장
- 국무총리 표창 수상
인천항 故(고) 윤영원 도선사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경상남도 거제에서 출생하여 광복 이후 15년간 해군에서 복무하고, 1992년 인천항 도선사로 정년으로 퇴임하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세월을 한국 해사·해운계 및 해군발전에 공헌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4월에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항해과 22기로 입학하여 수료했으며, 태평양전쟁에 징발되어 일제의 침략야욕에 희생이 될 수 없어 승선을 잠시 보류하다가 해방 후 1946년 진해 해안경비대에서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한·중 정상회담, 미국 초대 대사 초청 행사 등 국가안보외교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모든 역사의 굴곡을 겪으며 6·25전쟁 중에는 원산에서부터 진남포까지 동·서해의 기뢰 소해 작전을 펼쳐 선박 운항의 안전을 크게 도모하였다. 미 해군 주축의 연합함대합동작전에 참가하고 피난민 수송작전 등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며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며 구축함 함장과 한국함대 제1전단 사령관을 거쳐 1956년 해군수로국장에 임명되었다.
 
특히 그는, 당시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부산항과 인천항을 비롯하여 전국 해안에 대한 수로측량과 조류관측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해상(海象)변화에 대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해도와 수로도지를 간행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안전한 뱃길을 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후 5·16 군사 쿠데타 발발 후 해군 복무 생활을 정리하고 1962년 1월 1일부터 1992년 정년퇴임 때까지 30년 이상 인천항 도선사회 도선사로 활약했다. 특히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수출 위주의 국가 경제 발전으로 수도권의 원자재 수입항인 인천항의 역할이 커지고 있던 당시,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갑문(閘門)을 통과하는데도 장애가 많은 등 인천항의 위해요소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정부와 연계해 개선해 나가는 등 수도권 산업경제활동을 융성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해군과 도선사로서의 활동을 마치고 인천로타리클럽 활동을 시작으로 국제로터리클럽 활동까지 다양하게 활동하며 1980년대에는 로터리장학기금에 매년 1천 4백만 원씩 10년간을 기부하고 각종 재해에 성금을 내는 등 소외계층 및 장애우 등을 위한 봉사·후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인간의 가치는 봉사의 정도에 따라 평가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후대에 모범이 되는 자랑스러운 해양인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