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적선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선장 故 배순태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선정위원회(위원장 이권희, 이하 ‘선정위’)는 2018년 3월 14일 오전 11시 한국해기사협회 5층 회의실에서 2018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 인물 선정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선정위는 추천된 총 2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개개인의 다양한 경력과 공적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으며, 그 결과 故 배순태님을 만장일치로 확정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선정위원장인 이권희 한국해기사협회장을 비롯해 김종길 원로해기사, 김윤택 진해고등상선학교 동문회 회장, 임상현 한국도선사협회 회장등 11명이 참석하였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은 우리나라 해운발전의 초석이 된 해기사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해기 선원직업의 매력화 등을 위해 부산 태종대 공원 내(영도 등대 부근) 1,336㎡ 부지에 2009년 3월 6일에 설립되었으며, 2017년 현재까지 신성모, 이시형, 박옥규, 황부길, 신순성, 유항렬, 이재송, 윤상송, 석두옥, 김재곤, 정해춘, 김윤석, 윤영원 님 등 총 13명을 헌정한 바 있다.
한편 올해 헌정식은 오는 5월 31일 「바다의 날」을 즈음하여 개최할 예정이다.
2018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 헌정인물 故 배순태님 공적사항
<2018 해기사명예의전당 헌정인물 공적사항>
◆ 헌정인물 배순태(裵順泰) 1925년~2017년
◆ 주요경력
- 1925년 2월 26일 경남 창원군 상남면 출생
- 1944년 11월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항해과 졸업
- 1945년 11월 조선우선 금천호 3등 항해사
- 1948년 07월 부산수산대학 조교수(항해학, 운용학)
- 1950년 07월 FS형 군용선 선장으로 통영상륙작전에 참전
- 1950년 09월 해군사관학교 교수(운용학)
- 1952년 10월 극동해운 고려호 3등 항해사
- 1953년 06월 갑종선장 면허장 취득 및 대한해운공사 동해호 선장(대한민국 국적선 최초 세계일주)
- 1958년 10월 첫 정부시행 도선사 시험 합격
- 1959년 04월 인천항 도선사 취업
- 1974년 01월 한국도선사협회 창립 초대회장
- 1993년 02월 인천항 도선사 정년퇴임
- 1996년 05월 동탑산업훈장 수훈(제1회 바다의 날)
- 2002년 10월 한국해양대학교 명예공학박사 학위
- 2016년 03월 회고록『난 지금도 북극항해를 꿈꾼다』를 출판
- 2017년 4월 11일 향연 93세로 영면
◆ 해양산업발전에 기여한 사항
배순태는 1937년 창원 상남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44년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항해과를 졸업하고 1945년 11월 조선우선의 금천호(킨센마루, 이후 해양대학 실습선 반도호)에 첫 3등 항해사로 승선하였다. 금천호는 일본에서 수리를 마치고 부산항에 귀항했을 때 홍순덕 선장이 일본 선장으로부터 금천호를 접수하였고 이때 배순태가 일장기를 하강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역사적 임무를 담당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선장 및 선원 모두를 한국인으로 구성 한 극동해운(주)의 국적선 고려호(총톤수 6,800톤, 적재톤수 10,680톤)는 1952년 10월 부산항에서 고철 1,676톤을 선적하여 미국 포틀랜드에 양하 한 후 원조물자인 소맥 8,236톤과 잡화 1,014톤을 선적하여 1953년 1월 7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고려호 선장에는 해군 준장인 박옥규가 차출되었고, 대부분 사관은 해군현역이였으며, 배순태는 민간인으로 3등 항해사로 승선하였다.
배순태는 1953년 6월에 대한해운공사 동해호의 선장으로 승선하여 태평양을 대권항법으로 항해하여 운항기간을 7일 단축하였으며, 1959년 인천항 도선사로 취역한 후 34년간 도선사로서 근무하는 동안 1974년 한국도선사협회 창립 前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도선사협회 창립과 협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도선사로 근무하는 동안 동양최대의 인천항 제2도크가 준공(1974년 5월 10일)되었으나 도크운영의 안전을 위해서 외국의 우수한 도선사를 취역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순태 도선사는 관계당국과 인천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갑문통과 시범도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1976년 6월 22일에는 수도권에 밀가루가 품절되어 농림부가 긴급 수입한 소맥 5만4천 톤을 만재한 선박이 인천항에 입항했으나 갑문이 수리 중이라 입거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한다.
당시 농림부와 교통부 및 항만당국과 해운관계자들이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방법이 없었을 때 배순태 도선사가 도선을 자원하였고, 갑문과 선박의 제원을 면밀하게 계산하여 갑문을 유유히 통과 양곡부두에 접안시켜 밀가루 파동을 예방하게 되었다.
평택항에 국내 처음으로 10만 톤급 LNG선박이 입항 한 1986년 당시에는 LNG선박은 위험선박으로 자칫 잘못하여 사고가 날 경우 반경 10km가 폐허가 된다하여 도선사들이 도선을 기피하였으나, 배순태 도선사는 철저한 사전답사와 조류와 암초, 어장을 피해 LNG부두에 안전하게 접안시키는 등 도선사로서의 맡은바 임무뿐만 아니라 도선사들도 꺼려하는 어려운 도선을 치밀한 계획과 사전점검을 바탕으로 운항하여 도선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02년 9월 해기사 양성을 위해 경기도 양평의 임야 15만평(당시 시가 70억원)을 한국해양대학교에 기부하였고, 한국해양대학은 2002년 10월 25일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도선사 은퇴 후 1999년부터 흥해주식회사 회장으로 예선과 조선업을 병행하며 평생 바다를 떠나지 않은 ‘바다 사나이의 인생’을 살다가 2017년 4월 11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배순태의 장남은 유지를 받들어 「해봉 배순태상」을 제정하였고, 2017년 11월 23일 임기택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을 첫 수상자로 선정하여 시상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