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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래 2020-04-14 15:20:55
'무역대국 한국' 만든 선원들 [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30〉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바이킹의 후예도, 콜럼버스처럼 목숨을 바쳐 신대륙을 개척한 민족의 후예도 아니었다. 한국 선주들은 어떻게 해운업을 시작할지 막막했다. 먼저 한국 선원들은 미국과 일본 선주의 선박에 승선해 일하는, 소위 송출을 나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 선원들을 송출하던 회사들이 1980년대 들어 자본력을 바탕으로 선박을 확보해 선주사로 거듭났다. 송출 대상이었던 선원들은 신생 선박 회사의 임원이 되어 선박을 관리했다. 송출 선원 출신이라면 선박 관리나 화물 운송을 맡길 수 있다는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뢰관계 속에 송출 선원들이 선박을 운항하면서 우리 해운업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한국 선원들은 휴가 없이 1년 이상 계속 승선하는 참을성이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6개월에 한 번은 휴가를 갔다. 회사는 교대 비용과 휴가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1년 이상 승선하는 우리 선원들을 더 선호했다. 한국 선원이 가장 돋보이는 경우는 급히 ‘선창 소제’를 해야 할 때였다. 중국에서 원목을 양륙하고 나자 선장은 회사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이틀 내로 일본에서 철제를 실을 준비를 마칠 것.”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목 작업 후에는 껍질이 엄청나게 나온다. 1m 정도로 껍데기가 쌓여 있다. 이틀 내에 선창 5개의 원목 껍데기를 어떻게 치울 수 있는가. 보통 일이 아니다.
선교에서 당직을 서는, 선장을 제외한 전 선원은 선창으로 내려간다. 모두 삽질을 한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원목 껍데기를 슬링에 담아 크레인으로 올려 바다에 버려야 했다. 꼬박 이틀 밤을 새워 일을 마무리한다. 항구에 들어가서 검사원이 올라와 합격 판정을 해준다. 서양 선원들이라면 육지에서 사람을 올려 달라고 해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박이 이틀을 쉬니 선주로서는 10만 달러가량 손해가 난다. 선주 입장에서는 이러한 손해가 생기지 않도록 밤을 새워 일해 주는 한국 선원들이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이렇게 한국선원들은 신용을 얻었고 최대 5만 명의 송출 선원들이 1990년대 중반에는 연간 5억 달러의 외화를 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