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기사의 직역소개
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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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옥 선장 2020-09-11 10:12:17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왜 하느냐가 중요… 나 자신에 대한 탐구 선행돼야”
선장이 된 지금도 ‘승선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다는 전 선장에게는 그만의 사유와 성찰이 있다. 그는 끝없는 삶을 여전히 항해 중이다.
Q.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A. 현대 수프림호의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선장은 선박의 최고 책임자로, 선박의 안전운항뿐만 아니라 화물의 안전, 이곳에 승선하고 있는 모든 승무원의 안전, 환경오염 방지까지 그야말로 선박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이렇듯 막중한 책임과 함께 권한 또한 있습니다. 선박 안전 확보와 오염 방지에 필요한 대응조치에 있어 최우선적인 결정권한을 가지며, 그 결정이 전문가적인 판단에 의거해 이루어진 경우 회사, 용선주 또는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그 결정은 보호받게 되어 있습니다. 각종 법률에서 명시하는 사인(社人)에 대한 징계권, 인신 구속권한 역시 민간인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권한입니다.
‘Oh Captain, My Captain.’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왜 자신을 ‘선장’으로 부르라고 했을까요? 일상적인 레토릭(rhetoric)으로 쓰이는 이 ‘선장’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장으로서 나는 어떤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Q. 해양대 입학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A. 대입시절, 딱히 군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오직 제복에 대한 동경 그 하나로 육군사관학교에 두 번이나 지원했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낙방했고, 다른 진로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정말 불현듯 해양대학교가 떠올랐습니다. 아마 고3 시절 해양대학교를 먼저 생각해냈다면 굳이 재수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우의 신포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관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진급을 위해 직무능력 외적인 부분이 다소 작용하는 반면, 민간 기업에서는 오직 내 능력으로만 평가 받을 수 있기에 이에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졸업 후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학생들에게 문이 좁은 이 해운업계에서 매우 극적으로 한자리를 꿰차서 현대상선(현 HMM)에 입사했습니다. 일항사 진급 후 본사 운항팀에서 2년이 못되게 근무하고 퇴사를 했고, 긴 방황을 끝내고 다시 첫 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판단에 해상직으로 재입사하여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학교 및 직장 생활 내내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용맹정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고 있는 길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방황했습니다. 그 시간이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간 덕에 깨우친 바가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Q. 일과는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 선박 스케줄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크게 연안항해와 대양항해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연안항해 시에는 선박 통항량이 많고 입출항 스케줄 변동도 잦다보니 거의 하루종일 ECDIS/RADAR 모니터와 메일 시스템을 들여다보며 지냅니다.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양항해의 경우, 날씨가 좋지 않으면 하루종일 기상시스템을 모니터링해야 하지만 날씨가 좋을 때는 훨씬 여유로운 편입니다. 일단 선박 통항량이 적고 즉각 대응해야 할 일이 적다보니 훌륭한 일항사와 이항사를 믿고 숙면을 취한 후 8시 즈음 일과를 시작합니다. 야간에 항해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시차로 확인하지 못한 메일들은 없는 지 여유있게 검토하고 나름 스트레칭도 하며 오전 일과를 보냅니다. 오후에는 각종 수검 등에 대비한 선내 순찰을 실시하고 과업을 마무리 합니다.
Q. ‘국적선사 최초의 여성 선장'이라는 수식어로 업계의 화제가 되셨습니다. 오래간 승선할 수 있었던 힘이 있다면요.
A. ‘최초’,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스스로 실감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생긴 이 모습 그대로 쭉 승선을 했을 뿐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딱히 그 수식어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습니다. 어찌 보면 다른 남자 동기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는 화제라고도 생각합니다. 다만 특정 분야에서 일방의 성별이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에 있다면 그곳에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직군에 있으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것은 오직 입사할 때뿐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입사라는 관문이 여성인 나에게만 유독 바늘구멍만 했음에도 이를 문제 삼기보다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이었지요. 이제는 제 존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성별로 기회를 박탈하거나 차별하는 관행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깨닫고 타파하는데 나서길 바랍니다. 물론 제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이 직업을 유지했다면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겠지요. 최근 진급한 여성 선기장이 모두 비혼인 상태라 오히려 비혼이 아니고서는 이 직업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생길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바람은,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신 선후배님들이 계속 승선을 해서 그 어려움과 문제점에 대해 발언해주셨으면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직업을 단순히 밥벌이 정도로 여기지 않고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왜 승선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서 승선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자리까지 왔던 이유는 ‘끝을 보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일에는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고 그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도망치다보니 항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다로 돌아온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다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이게 맞는 것인가’ 의심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막연하게나마 끝이 있다고 느꼈고 그게 선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막연히 생각했던 이 끝이 사실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는 게 함정이긴 합니다.
Q. 이 직종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있다면요.
A. 항해사라는 직업은 블루칼라(blue collar)와 화이트칼라(white collar)를 오가는데 그 매력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업무를 통해 균형을 이룬다고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직업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인데 항해사라는 직업은 그 조화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Deck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블루칼라적인 업무에서는 땀 흘려 정직하게 몸으로 수행해내고, 근무복을 갖춰 입고 Bridge에서 항해를 할 때는 화이트칼라적인 업무로서 지적 능력을 발휘해 수행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승선 생활이 3D 업종으로 인식되곤 하는데, 이는 항해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잘 알려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알리는 것은 아마 우리 자신의 문제이겠지만 말입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선박도 나름의 사회이기는 합니다만 육상에서만큼의 자극이 있는 것은 아니다보니 나름의 절제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단절이나 고립으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수행자의 절제된 생활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광고와 그로 인해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소비들에서 자유로워지는 환경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자연과 우주가 느껴지는 업무 환경을 꼽고 싶습니다. 대항해시대처럼 해, 달, 별을 보며 길을 찾아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들을 관찰하고 느끼며 마주하고 순응해야하는 환경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겸허하게 한다고 할까요. 북태평양 그 넓은 하늘도 부족하다 할 정도로 빼곡한 별들, 동 트기 전 노을보다도 더 붉게 하늘을 물들이며 물속에서 마저 존재감을 내뿜는 태양, 거울 같은 밤바다를 핀 조명으로 밝히는 달빛을 풍광으로 즐기는 감흥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물론 태풍의 눈에서 300마일 이상 떨어져 있어도 그 위용을 내뿜는 풍랑에는 그저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닫는 나약한 인간으로 돌아오지만요.
Q. 이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면요.
A.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조건이나 마음가짐 같은 건 없다.’ 어린 시절의 제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 그 일이 내게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시쳇말로 ‘뇌피셜’이라고도 하지요. 무엇이든 일단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그 이유를 찾으세요. 치열하게.
Q.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 해기사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A. 그토록 원하던 학교 그리고 회사에 들어갔음에도 그곳에 정답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지요.
해기사들의 이직률이 상당합니다. 저도 그 이직률에 이바지했던 사람이고요. 다이내믹한 무언가가 벌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던 젊은 시절, routine한 일상과 고립된 환경에 갇혀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택한 육상근무는 또 얼마나 지루하고 팍팍하던가요? ‘이곳만 아니면, 이 일만 아니면 된다’는 심정으로 택한 그 일은 나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뿐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왜’ 하고 있느냐가 내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을 저 역시 너무 늦게 깨닫고 있습니다. 진로 선택에 앞서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하는 나 자신에 대한 탐구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이 질문이 어려운 후배님들에게 제가 들은 조언 하나를 첨언해봅니다. 지금 당장 동문 명부를 쭉 훑어보고 그 중 가장 관심이 가는 선배를 택해보세요. 그리고 그 선배를 찾아가 ‘당신은 어떻게 하여 현재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가’를 물어보고 그 일을 해보세요. 물론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곳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지레짐작으로 단념하는 것보다는 100배쯤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진정한 당신을 만들어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