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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 변재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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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철 2025-09-19 10:02:07

 

원로 해기사 특집 ①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 변재철 회장


Q. 현재 하시는 활동을 기반으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국립한국해양대학교 기관과 8기 졸업생 변재철입니다. 현재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의 회장으로서 매일 회사에 출근해 임직원들과 어울리며 일하고 있습니다. 젊은 후배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호흡하며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Q. 100세 시대가 당연하게 자리 잡은 현시점에서 회장님의 건강과 장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려진 연세로 올해 아흔둘이신데, 현재 업계에선 회장님을 포함하여 해운업의 최고 위치, 리더 그룹에 계신 원로 해기사들께서 나이가 무색하게 왕성한 커리어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그 비결을 알 수 있을까요?
특별한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출근하고, 밤 10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듭니다. 과식을 피하고 하루 5천 보 걷기를 습관화했으며, 주말에는 아들과 딸 등 가족과 외식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 가장 큰 건강의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Q. 해운업에 종사하신 지 무려 60년이 넘으셨습니다. 경력과 건강을 오래도록 유지하시는 원동력은 장기간 이어진 근무 활동을 통해 생산된다고 봅니다. 노후 건강 관리와 젊은 시절의 승선 생활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돌아보면 승선을 시작할 때부터 늘 제 삶을 지탱한 힘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제때 잠자리에 드는 단순한 원칙을 지금까지 지켜왔습니다. 젊었을 때는 골프로, 나이가 들어서는 매일 걷기로 몸을 움직이며 살아온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작은 습관들이 결국 삶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자, 오늘의 저를 만든 소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Q. 해기사라는 직업이 회장님 개인의 마인드 컨트롤과 건강에 어떤 순기능, 선순환을 이끄는지 궁금합니다. 해기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장님의 개인적인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해기사는 참 매력적인 직업입니다. 젊었을 때는 승선을 통해 생활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관련 기관이나 업계에 취직해 안정적인 삶을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선후배들이 함께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늘 의지할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됩니다. 무엇보다 ‘해기사’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해운업계 취업에 큰 도움이 되니, 이보다 든든한 직업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Q. 라스코해운을 전신으로 출범한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가 어느덧 30년 차에 이르렀습니다.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이 장수기업에 들어설 수 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저희 8기생들이 졸업하던 시절에는 승선할 선박이 거의 없어 모두가 각자의 길을 찾아 육상에서 직업을 구해야 했습니다. 저 역시 배정고 교사로 시작해 동아대학교와 수산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시간을 보냈고, 라이베리아 기국 선박에서 기관장으로 승선했습니다. 승선 이후에는 미국 선박 회사인 라스코 해운의 해사 부서에서 감독으로서 육상 근무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선박 회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라스코 해운이 폐업을 선언하면서, 그곳에서 승선하던 한국 선원들과 미얀마 선원들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때 미얀마 선원들을 일본과 한국 선주사에 연결해 승선 기회를 알선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를 세웠습니다. 해상의 기관장과 육상의 공무 감독으로 지내며 모은 자본이 바탕이 됐습니다. 창업하면서 “정직, 공정, 청렴”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켜왔기에 우수하고 성실한 선원들이 자연스럽게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에 모였습니다. 실제로 한 번은 미얀마 지사장이 선원들로부터 부당한 커미션을 받았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철저히 조사한 끝에 사실로 밝혀졌고, 저는 즉각 해고 조치를 내린 뒤 그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우리 회사가 지켜온 원칙이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오늘날까지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가 신뢰 속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남들보다 긴 역사의 업무를 거치며 맡으신 일에서 느낀 고난과 보람도 남다를 듯합니다. 일하시면서 기억나시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승선하실 때의 일화도 좋고, 사업 일화도 좋습니다.
회고록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PAC SEA호 주기관 고장 수리 에피소드입니다. 1991년경으로 기억합니다. 본선에는 주기관으로 트윈 도이치 엔진 두 기가 장착되어 있었고, 홍콩 조선소에서 드라이 도킹 수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감독은 보오만 공무 담당 책임자였습니다. 수리 후 출항했는데, 출력이 약해 속도가 고작 3노트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허한오 선장과 김정웅 기관장이 선박을 지휘하고 있었고, 목적지는 미국 애버딘이었습니다. 부득이하게 대만 기륭항에서 임시로 계선 수리를 했습니다. 라스코 본사에 보고가 올라가자, 슈니츠 회장이 즉각 독일 도이치 엔진 전문 기사인 슈미트 씨를 벤쿠버에서 기륭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는 5일간 수리를 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부산에서 라스코 공무 감독으로 근무 중이었는데, 출장 명령을 받고 기륭으로 갔습니다. 기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연료변의 조립과 연료 분사 펌프 조정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판단으로는 연료변이 아니라 분사 시기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슈미트 씨는 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5일간 수리를 했음에도 출력은 개선되지 않았고, 보오만 씨는 선장에게 3노트로 동경까지 항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단, 저에게 동승해 제 소신대로 수리를 시도하라고 했고, 저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배에 승선한 뒤, 연료 분사 시기를 조금씩 조정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약 5일 만에 출력이 개선되어 속력이 12노트까지 올라갔습니다. 본사에 수리 성공 전문을 보내고 곧바로 “브라보!”를 연발하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애버딘에 새벽녘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당시 슈니츠 회장의 사위가 직접 마중을 나와 저를 호텔에 투숙시켜 준 일화는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Q. 2021년에는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셨습니다. 그때의 일화와 감회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금탑산업훈장은 제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입니다. 2021년 6월 4일, 지세포 해양공원에서 열린 바다의 날 기념식에서 수훈했는데, 그 순간의 감격은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 있습니다. 훈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귀하는 해양 산업 육성을 통하여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바 공로가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이 훈장을 수여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수여 날인과 함께 전 국무총리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 전해철의 이서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이 훈장의 문구와 선명히 적힌 문장을 들었을 때의 벅찬 울림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수훈 소식을 몰랐습니다. 2021년 3월쯤 부산 항만청에서 이력서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와서 간단히 적어 보냈습니다. 한 달 뒤에는 업적과 이력을 좀 더 자세히 써 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그제야 돌아오는 바다의 날에 포상이 있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금탑산업훈장이라는 사실은 수훈식 일주일 전에서야 알았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하게 해운 발전에 공헌한 선후배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영광을 받게 된 것을 무한히 영예롭게 생각하며, 앞으로 더 많은 후배가 이 훈장을 이어받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선박이 거의 없었고, 해양계 대학을 나와도 승선할 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근무한 라스코 해운은 한국 선원들을 승선시켜 주었고, 선박 관리와 신조선 건조 감독 같은 선주의 대행 업무를 맡았습니다. 김동화(1기), 황병도(5기), 그리고 제가 주축이 되어 부산 라스코 해운을 설립했고, 1970년대부터 한국 선원 고용을 본격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심각한 달러 부족 상황이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달러 벌이가 곧 애국”이라는 기치 아래 동분서주하던 시기였습니다. 라스코 해운이야말로 한국 수출선원의 효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회사가 폐업할 때까지 온갖 수난을 선원들과 함께하며 2015년까지 근무했습니다.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는 라스코 해운을 모체로 설립한 회사입니다.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게 된 것도 이런 발자취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Q. 누구보다 오래 근속하신 만큼 후배 직원들과 세대 차가 컸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들과 과거 어떻게 거리를 좁히며 함께 일하셨는지, 그리고 현재 기업을 운영하는 후배들이 요즘 젊은 직원을 대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오랜 노하우를 듣고 싶습니다.
요즘 젊은이는 자기 개성이 뚜렷하고 주장이 분명합니다. 수직적인 상하 질서에는 회의적이지만, 그만큼 민주적입니다. 또 컴퓨터와 AI 등의 새로운 기술에 강하며 독립적입니다. 기성세대와는 때로 잘 융화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 세상은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며 협조한다면, 오히려 두 세대가 어울려 더 효율적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사에서도 종종 “우리는 원팀(One Team)이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팀이라면 서로 어울리고 이해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각자의 장점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대 간의 화합을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습니다.


Q. 곧 승선할 후배 해기사들은 100세를 넘어 120세 시대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회장님의 시대보다도 더 오래 직업 활동과 노후를 고민할 세대인데요. 장기 승선 여부와 경력 관리를 고민하는 젊은 후배 해기사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젊은 후배 해기사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장기 승선 여부와 앞으로의 경력 관리일 것입니다. 같은 길을 걸어왔기에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해기사는 단순히 배를 타는 직업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길입니다. 젊을 때는 승선하면서 자금을 마련하고, 선박을 직접 경험하며 업계의 본질을 몸으로 익힐 수 있습니다. 그 후에는 제가 가진 경험을 바탕으로 육상 근무로 이어가며 전문성을 넓히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경험에다 자본까지 쌓이며 자연스럽게 업계의 최고 전문가가 됩니다.
후배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에서 진정한 전문가는 결코 설 자리를 잃지 않습니다. 선상에서 조금 더, 조금 오래 노력하고 꾸준히 자기 길을 닦는다면 특출한 전문가로서 존중받고 대접받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데 필요한 것들이 투자한 시간만큼 자연스레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해상이든 육상이든 중요한 것은 경험을 어떻게 경력으로 쌓아가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전문성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해기사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그 길 위에서 성실히 걸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Q. 향후 회장님의 비전 및 계획이 궁금합니다. 100세 그 너머로요.
작은 기업이지만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를 젊은 세대 구성원들이 함께 잘 꾸려 갈 수 있도록 기초를 든든히 다져서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바람입니다. 회사는 결국 조직력으로 움직입니다. 그렇기에 구성원 개개인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자 도리’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화를 남기고 이어주는 것이 제가 바라보는 가장 큰 비전입니다.